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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실분과 순장의 폐지: 무덤 속을 넘나들다

원성왕릉
원성왕릉

신라 석실분의 개요와 특성

석실분(石室墳)은 신라 초기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다른 독창적인 무덤 형태입니다. 적석목곽분은 한 명의 인물만을 매장하는 단장(單葬) 방식으로, 무덤 입구가 수직으로 뚫린 형태(竪穴式)였습니다. 반면 석실분은 여러 차례 추가장이 가능한 다장(多葬) 구조로, 무덤의 한쪽 벽에 출입구를 만들어 사람의 왕래가 가능하도록 한 횡혈식(橫穴式) 무덤입니다.

석실분의 구조는 크게 석실(현실), 문(입구), 연도(널길), 묘도(무덤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석실의 내부는 벽을 약간 기울여 쌓으며, 장방형 또는 방형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형태는 기존 무덤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가지며, 신라의 새로운 내세관(來世觀)과 현실적 필요에 맞게 설계되었습니다.

석실분(石室墳)
석실분(石室墳)

이러한 석실분을 수용하게 된 이유는 내세에 대한 관념 변화뿐만 아니라, 왕경(王京) 경주의 확장과 무덤 입지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결과 왕족과 귀족의 무덤 영역이 구분되고, 왕의 무덤은 점차 산지로 이동했습니다.

 

석실분의 등장과 왕경 확장

석실분은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보다 지방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5세기에는 경산, 달성, 상주와 같은 지역에서 지배자의 무덤으로 사용되었고, 6세기 초까지도 포항, 창녕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포항 냉수리 석실분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에서 발견된 대형 무덤입니다. 경산 임당과 창녕 계성리에서도 석실분이 등장하며, 특히 계성리에서는 금공품과 철기류가 풍부하게 출토되었습니다.

6세기 무렵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며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흡수하고, 북쪽으로는 한강 하류, 동해안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에 신라 양식의 석실분이 축조되었으며, 울릉도까지 이러한 무덤이 나타난 사례가 확인되었습니다.

경주에서는 6세기 중엽부터 석실분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무덤의 입지는 평지에서 산지로 옮겨졌습니다. 초기 석실분의 대표적인 예는 황남동 151호와 보문동합장분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라의 왕족과 최고 귀족들의 무덤인 서악동 고분군으로 이어집니다.

 

석실분의 간소화와 불교의 영향

석실분에는 이전 시기의 적석목곽분에 비해 부장품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이는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며 장례 문화를 간소화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 토기 양식이 변화하면서 도장 무늬를 사용한 인화문(印花文) 토기가 등장하였고, 이는 8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석실분 내부 구조는 다양한 장치들로 구분되는데, 죽은 자의 머리나 발치에 두는 두침(頭枕)과 족좌(足座)와 같은 요소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무덤의 기능과 상징성을 더욱 체계화하며, 불교의 영향을 받아 간소하고 실용적인 장례 문화로 발전하게 됩니다.

 

왕릉 체제의 확립과 변화

신라가 통일 이후 횡혈식 석실분을 왕릉 체제로 정착시키면서 능묘(陵墓) 양식이 발전했습니다. 초기 왕릉에서는 봉분 주변을 감싸는 호석(護石)과 석상을 설치해 왕릉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성덕왕릉부터는 난간석(欄干石)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같은 조각이 무덤을 장식하며, 왕릉의 상징적 의미를 강화했습니다.

십이지신상은 처음에는 무덤 내부의 명기(明器)로 사용되다가 점차 무덤 외부로 옮겨졌습니다. 호석의 형태도 단순한 돌쌓기에서 판석과 탱석을 활용한 정교한 구조로 발전했습니다. 신라 왕릉의 양식은 흥덕왕릉까지 유지되었으나, 9세기 후반 이후에는 점차 간소화되었습니다.

 

순장의 폐지와 토용의 등장

502년 지증왕은 순장(殉葬)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순장은 살아있는 사람을 왕과 함께 무덤에 매장하는 잔혹한 관습으로, 불교의 내세관이 확산되면서 사라졌습니다. 대신 순장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토용(土俑)이 무덤에 부장되기 시작했습니다.

토용
토용

토용은 사람이나 동물을 본뜬 작은 조각상으로, 무덤의 주인을 대신해 저승에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경주 황성동과 용강동 석실분에서는 신라와 당나라 복식을 입은 토용이 발견되어 당시 복식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토용은 남성과 여성, 동물로 구분되며, 남성 토용은 관복을 입고 홀을 든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여성 토용은 크기와 복식에 따라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며, 일부는 화려하게 채색된 것도 확인됩니다. 이러한 토용과 함께 청동으로 만든 십이지용도 무덤에 부장되었습니다.

 

결론: 신라 석실분과 장례 문화의 진화

신라 석실분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사회와 종교, 정치적 변화를 반영한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초기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의 변화는 내세관의 진화와 왕경 확장이라는 현실적 필요가 맞물린 결과입니다. 순장의 폐지와 토용의 등장은 불교가 신라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증거로 볼 수 있으며, 무덤의 간소화는 신라 왕릉의 양식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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