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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군-예식진 형제: 백제의 역신인가, 당의 공신인가?

예군-예식진 형제

백제의 멸망기에 활동하며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예군과 예식진 형제입니다. 이들은 백제의 지방 관리로 시작해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당(唐)에서 관리로 활동하며 독특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글에서는 두 형제가 백제의 몰락과 그 이후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들이 역사의 배신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질서 속에서 공신이 되었는지를 탐구해보겠습니다.

 

예군-예식진 형제의 출신과 가계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구당서』 등 여러 문헌과 묘지명(墓誌銘)을 통해 확인됩니다. 예식진의 묘지명은 2006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되었고, 예군의 묘지명은 2010년 서안시 근처 예씨 가족 묘에서 발굴되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출생 배경과 활동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군은 613년(무왕 14) 부여에서 태어났고, 예식진은 615년 웅진(현재의 공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가문은 대대로 백제에서 좌평(佐平)을 지냈으며, 예씨 집안은 당시 백제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유력 가문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에서 기원한 집안이라고 주장하며, 백제를 배신한 후 당나라로부터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백제 멸망기: 형제의 결정적 선택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압박에 웅진성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예군과 예식진 형제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지만 예군과 예식진은 웅진성을 기반으로 의자왕을 배신하고, 그를 나당연합군에 넘깁니다. 이 사건은 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군과 예식진은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었고, 그들의 배신은 당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곧바로 관직에 임명됩니다. 예군은 절충도위(折衝都尉)가 되었고, 예식진은 동명주(東明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어 백제 고지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웅진도독부에서의 활동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웅진도독부의 설치와 운영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웅진도독부는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설치한 행정 기구로, 백제 유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예군은 왜(일본)와의 외교 사절로 파견되는 등 웅진도독부의 외교 문제 해결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예식진 역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충성을 바치며,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이라는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습니다. 두 형제는 웅진도독부를 통해 당나라의 백제 지배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신라와의 대립 과정에서도 당의 입장을 대변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나라에서의 최후

예식진은 672년 신라와의 갈등이 한창일 때 내주(萊州)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예군은 이후에도 당나라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67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형제의 시신은 장안(長安) 근처 고양원(高陽原)에 묻히며 예씨 가문의 가묘를 이루었습니다. 당 조정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었고, 이는 당나라가 그들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군-예식진 형제

 

예군과 예식진: 배신자와 공신의 경계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백제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백제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에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충성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적응했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 유민들로부터는 배신자로 평가받았지만, 당나라에서는 그 공을 인정받아 중요한 관직에 올랐고, 가문도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예군-예식진 형제

그들의 선택은 단순히 배신이라기보다는 당시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생존을 도모한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백제 멸망 이후에도 당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가문을 발전시켰고, 그들의 후손들도 당나라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결론

예군과 예식진 형제의 삶은 백제 멸망과 당나라 지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를 반영합니다. 그들은 한때 백제의 고위 관료였지만, 멸망의 순간에 새로운 선택을 했고, 당나라의 공신으로 인정받으며 가문을 유지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당시의 정치적 변화와 생존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며, 그들을 단순한 배신자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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