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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백제의 마지막 충신

계백 표준영정
계백 표준영정

1. 개요

계백(階伯)은 백제의 장군으로, 660년 황산벌에서 신라와 당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은 나라를 지킨 충신으로서 평가받고 있으며,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2. 백제 내부의 정세와 계백의 중용

계백의 이름은 660년의 전투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는 인물로, 그의 출신 배경이나 가문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계백열전'에서는 그가 달솔(達率)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정치적 또는 군사적 활동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의자왕은 집권 초기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나, 후에는 실정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계백은 신뢰받지 못한 인물이었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의자왕은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계백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신라군을 저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3. 임전의 각오: 가족을 베고 출정하다

계백은 의자왕의 명령을 받고 출정하기에 앞서 가족을 모두 죽였다. 그는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히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며 가족을 죽였다. 이는 그가 상황을 절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 말의 문신 권근은 그의 행동을 비판했으나, 이는 각기 다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결국 계백은 가족을 죽임으로써 병사들에게 결사항전의 각오를 보이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4. 황산벌 전투

가족을 잃은 계백은 5천의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5만의 신라군을 상대해야 했다. 계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 진영을 세우고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으며, 신라군의 공격을 받은 계백은 강력한 저항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수적으로 열세인 백제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황산벌 전투
황산벌 전투

신라군의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계백은 병사들에게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상영과 충상은 사로잡혔고, 계백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의 전투에서 신라군은 어린 화랑들의 희생을 통해 사기를 고취시키려 했고, 결국 전투는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

 

5. 사후의 평가

계백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지킨 충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 시대부터 그의 충신으로서의 이미지는 굳건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도 포함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더욱 부각되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를 언급하며 충신으로서의 업적을 기렸다. 1603년, 성충과 함께 백제의 충신으로 언급되었고, 1617년에는 조선에서 존경받는 인물로서 소개되었다.

그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후대에도 충신으로서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았다. 가족을 베고 전사한 그의 모습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로서 기억되고 있다.

 

6. 결론

계백은 백제의 마지막 순간에 나라를 위해 싸운 충신으로서 그 명성이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그의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패를 넘어, 백제인의 고난과 결의를 상징하며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앞으로도 계백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에서 빛나는 하나의 전쟁 전설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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