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 사비시대의 중심지였던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사터에 위치한 석탑입니다.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이 탑은 목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백제 시대의 석탑 중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됩니다. 정림사지 석탑은 이후 한국 석탑 양식의 시작점이 되었고, 신라와 고려로 이어지며 한국이 ‘석탑의 나라’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정림사터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기와에 새겨진 ‘정림사(定林寺)’라는 명칭은 이 석탑의 정확한 명칭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발견 이전까지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비문 때문에 ‘평제탑(平濟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한국 석탑의 시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건립
한국의 불탑은 불교 전래와 함께 시작된 목조탑에서 기원합니다. 초기 불탑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현존하는 유물이 거의 없지만, 이후 백제와 신라에서는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으로 변화하며 석탑의 전통이 정착됩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이러한 목조에서 석조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한국 석탑 양식의 전환기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비슷한 시기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의 비교는 학계에서 중요한 논제로 남아 있습니다. 두 석탑의 건립 시기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두 석탑 모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들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 석탑의 기원을 삼국시대 말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구조와 양식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총 높이 약 8.33m로, 지대석,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됩니다. 각 층은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구조로 완벽한 비례와 균형미를 자랑합니다. 특히, 탑의 기초 척도인 1척(35cm)을 기준으로 전체 구조가 정밀하게 설계되었으며, 이는 한국 석탑의 건축적 정교함을 잘 보여줍니다.
이 탑의 탑신부는 목조건축에서 유래한 오금법(기둥이 안쪽으로 약간 쏠리는 기법)을 반영하며, 각층의 옥개석(지붕돌)은 목조 건축의 공포(拱包) 부분을 모방한 구조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백제 석탑이 단순한 석조 건축물에 그치지 않고 목조 건축의 기술을 석조로 변형한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줍니다.
백제와 신라, 일본에 미친 영향
백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뛰어난 건축 기술을 자랑했으며, 그 영향은 신라와 일본에도 미쳤습니다.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시 백제 출신의 아비지가 초빙된 일화나, 일본의 초기 사찰 건립에 백제 기술자들이 참여한 사례는 백제 건축술의 우수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일본 석탑사의 삼층석탑은 백제 석탑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며, 이는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들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백제의 석탑 양식이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합니다.
나당연합군의 침략과 '평제탑'의 수모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큰 수모를 겪었습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를 정복한 기념으로 정림사 중앙에 위치한 석탑에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비문을 새기고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 이 석탑은 ‘평제탑’으로 불리며 백제 멸망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비문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태자, 좌평 등 고위 인사들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백제 땅에 행정구역을 설치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백제의 패망을 기념하는 승전비 역할을 했으며, 이후 정림사는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복원과 현재의 의미
정림사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고려 시대 명문 기와를 통해 이 석탑은 본래 ‘정림사 오층석탑’으로 불려야 함이 밝혀졌습니다. 기와에는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이를 통해 고려 시대에도 정림사가 사찰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문화와 기술을 대표하는 동시에 백제 멸망의 상처를 간직한 유적입니다. 오늘날 이 탑은 한국 석탑의 역사적 발전과 동아시아 건축 교류를 증명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결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한국 석탑의 발전 과정과 백제의 역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비록 당나라의 비문으로 인해 한때 백제의 멸망을 상징하는 ‘평제탑’으로 불리며 아픔을 겪었지만, 오늘날에는 백제와 한국 건축의 찬란한 유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석탑은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친 백제 건축의 정수로,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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