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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후백제의 창업자이자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란 영웅

견훤(甄萱)
견훤(甄萱)

 

1. 견훤의 배경과 출생

견훤(甄萱)은 867년에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 짓던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후에 군장으로 성장하여 자신의 가문을 일으켰다. 견훤의 본래 성은 이(李)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개명했다는 전해진다. 그의 출생에 대한 전설 중 하나는 그가 태어났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 어머니의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로, 이는 그가 무인으로서의 강인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견훤은 어린 시절부터 전투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청년기에는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으며 전투 기술을 연마하였다. 그는 특히 해변을 지키며 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데 힘썼고, 이 과정에서 비장(裨將)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경험들은 후백제를 건국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 후백제의 창립과 세력 확장

2.1. 난세의 기회

892년, 신라의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혼란 속에서 견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무리를 모아 왕경 서남쪽의 주현들을 공격하면서 순식간에 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형성했다. 무진주를 점령한 후, 그는 이 지역의 관직을 세우고 스스로 자칭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그가 후삼국 시대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2. 후백제의 건국

900년,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그는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고 선언했다. 견훤의 후백제는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 후백제의 전쟁과 대업

후백제 건국 이후, 견훤은 북쪽의 궁예와의 전쟁을 비롯하여 여러 전투를 치르며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3.1. 왕건과의 대립

920년, 견훤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공산 전투에서는 고려군의 상장들을 죽이며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이후 고창전투에서 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전투들은 그가 고려와의 전쟁에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긴장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3.2. 내분과 배신

그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인 금강이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자, 다른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금강은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었으며, 그는 한때 영웅으로 떠올랐던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4. 견훤의 최후와 후백제의 멸망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에 도주하여 고려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왕건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936년, 그는 왕건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자신의 아들을 처벌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펼쳤으나, 결국에는 고려군의 공격에 의해 후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전투의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사망하게 된다.

 

5. 결론: 견훤의 역사적 의의

견훤은 자신의 힘과 무력으로 나라를 세우고 후삼국 시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힘에 의존한 정책을 펼치고, 내부의 배신과 분열로 인해 자신의 나라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강력한 리더십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내부의 분열과 불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삶은 한편으로는 전쟁의 영웅으로서 기억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신과 몰락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후백제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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