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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언위: 나말여초 최고의 문장가, 고려 왕조의 개막을 기록하다

최언위(崔彦撝)
최언위(崔彦撝)

1. 최언위의 삶과 시대적 배경

최언위(崔彦撝)는 나말여초의 격동기 속에서 신라와 고려 양쪽 왕조를 경험한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학자입니다. 그는 두 왕조에서 모두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며 학문적 업적을 쌓았으며, 특히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6두품 지식인 출신으로 신라 말기 사회에서 제약을 받았던 최언위는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급제하며 명성을 쌓은 인물이지만, 그의 진정한 활약은 고려로 귀부한 이후에 시작됩니다.

2. 가계와 가문의 사회적 위치

최언위의 집안은 신라 말기부터 사회적 기반이 있던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선대에서 확인되는 인물로는 태대각간 최유덕이 있는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최유덕은 자신의 집을 절로 헌납해 유덕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최언위의 가문은 경주 일대에서 유력한 지식인 가문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들들과 손자들 역시 문학과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최언위의 가계는 고려 시대까지 번성했습니다.

3. 늦깎이 유학생 최언위의 당나라 유학

최언위는 신라 국학에서 수학한 뒤,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빈공과에 급제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유학을 떠난 나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18세가 아닌 30세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이는 12세에 유학한 최치원과 대조적이며, 최언위의 학문적 성취가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시 그는 발해의 재상 오소도의 아들과 빈공과 성적을 두고 경쟁하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신라 출신 학자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러나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최언위는 그곳에서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잃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4. 신라와 고려 사이에서의 선택

최언위는 신라의 몰락을 목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고려 왕조에 귀부했습니다. 정확한 귀부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그는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태자사부로 임명되며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고려 초기 궁궐의 명칭을 짓는 일에도 관여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왕조의 상징적 공간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5. 고려에서의 문학적 성취

고려에서 최언위의 역할은 비문 작성과 외교 문서 작성에 두드러졌습니다. 그는 왕의 명을 받아 여러 사찰과 승려들의 비문을 찬술했으며, 그의 작품은 당시 고려 사회의 사상적 흐름을 잘 반영합니다. 특히 그는 77세의 나이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편의 비문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최언위의 비문들은 주로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나말여초의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6. 최언위가 남긴 유산과 한계

비록 최언위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후대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희미해졌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이 대부분 공적인 성격의 비문에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나 산문 등의 개인적 작품이 남아 있었다면, 그의 내면 세계와 철학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7. 결론: 최언위, 두 왕조를 잇는 지식인의 초상

최언위는 나말여초의 격동기 속에서 신라와 고려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유연한 처세와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통해 두 왕조에서 인정받은 지식인의 표본이었습니다. 신라 사회의 한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친 그의 이야기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유연하게 적응한 인물로서 후대에 시사점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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