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성(長安城)은 현재 북한 평양직할시 중구역과 평천구역 일대에 위치한 고구려 후기 도성입니다. 흔히 평양성(平壤城)으로도 불리며,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의 평양성과 구분하기 위해 후기 평양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장안성의 고고학적 발굴 내용, 축성 과정,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장안성의 위치와 특징
장안성은 대동강 북쪽의 모란봉(해발 96.1m)과 을밀대, 만수대 등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축조되었습니다.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활용하며 성벽을 쌓은 이 도성은 자연 지형과 인공적인 방어 구조가 조화를 이룬 평산성(平山城)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장안성의 성벽 외곽 둘레는 약 16km, 내부 성벽까지 포함하면 23km에 달하며, 산성과 평지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방어적인 도시 형태가 특징입니다.
고구려의 기존 도성과는 달리 장안성은 도시 내부에 주민 거주 지역이 포함된 것이 특징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왕궁 방어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방어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당대 동아시아 도성 구조에 큰 변화를 예고한 혁신적인 설계였습니다. 장안성은 크게 내성, 중성, 외성, 북성으로 구분됩니다. 외성에서는 정방형 구획의 격자형 도로 구조가 확인되어 고구려 당시 방리제(坊里制)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 조사와 발견
장안성에 대한 최초의 고고학적 발굴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고이즈미 아키오 등이 만수대 일대에서 성벽과 건물지 등을 조사했습니다. 장안성은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제한적이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발굴에서 내성과 외성 일부가 조사되었고, 2011년 외성의 몇 개 지점에서 추가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장안성은 북성, 내성, 중성, 외성의 네 구역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성문과 방어 시설이 명확히 구분되었습니다. 내성에는 왕궁이 있었고, 중성에는 관청 건물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외성은 방형의 구획 구조를 이루며 도로와 운하가 설치된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외성의 구획은 대로, 중로, 소로로 나뉘며, 이는 당대 중국의 도성 구조와 유사한 점을 보여줍니다.
장안성의 축조 과정
《삼국사기》에 따르면, 장안성의 축성은 양원왕 8년(55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평원왕 28년(586년)에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장안성 축성의 구체적인 과정은 발견된 각자성석(刻字城石)을 통해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각자성석에는 축성 당시의 감독자, 축성 구간, 그리고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기축(己丑), 기유(己酉), 병술(丙戌) 연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내성은 566년에 완성되었고, 외성은 천도 이후 589년에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또한 《평양속지》에 따르면 북성에서 발견된 성돌에는 “본 성은 42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장안성의 축조가 최소 42년에 걸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장안성의 내성은 초기 별궁의 역할을 했으며, 586년에 본격적으로 도읍이 이전된 후 중성, 외성, 북성이 차례로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장안성 축조의 의미
장안성은 고구려 후기 도성의 특징을 집약한 상징적인 유적입니다. 왕이 머무르는 내성과 더불어 주민들의 생활 구역까지 포함한 외성을 함께 설계한 점은 당시 동아시아 도성 설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중국의 도성은 일반적으로 평면 방형으로 설계되었으나, 장안성은 지형에 맞춰 성벽을 쌓는 고구려 특유의 축성 기법을 따랐습니다. 성벽의 외부는 석축으로, 내부는 흙을 쌓아 만든 토심석축(토축부)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고구려 후기의 독특한 축성 방식으로 평가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외성이 토성으로 인식되었으나, 실제로는 성벽의 붕괴 후 흙을 덮어 복구한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장안성의 방리제 도입은 주민 통제와 도시 계획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중국 북위(北魏)의 평성(平城)에서 시작된 제도로, 이후 수·당 시대의 장안성으로 계승되었으며 동아시아 도성제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결론
장안성(평양성)은 고구려 후기의 정치, 군사, 생활 구조를 통합한 도성으로, 동아시아 고대 도성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왕궁과 주민 거주지를 함께 방어할 수 있는 구조는 고구려의 독창적인 도시 설계 사상을 보여주며, 중국의 방리제와 같은 외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지형을 활용한 고유한 축성 기법을 발전시켰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장안성은 평양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개축과 변형이 이어졌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장안성의 유적은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탐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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