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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 전쟁: 양제가 자초한 수의 멸망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고구려가 강대국 수(隋)와 충돌하며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중원의 통일을 목표로 한 수와 독립적 국제 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고구려의 충돌이었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결국 수의 멸망으로 이어진 과정을 다루고자 한다.

 

고구려와 수 전쟁

 

수(隋)의 중원 통일과 국제 질서의 재편

수나라가 남조와 북조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것은 589년이었다. 중원의 통일은 진(秦)과 한(漢) 시절처럼 주변국들에게 새로운 국제 질서를 강요하는 신호로 작용했다. 수나라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와 돌궐 같은 강국들은 기존의 병렬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수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90년대: 고구려와 수의 외교적 긴장

589년에 수가 진(陳)을 멸망시키자 고구려는 이에 대비해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수 문제(隋文帝)는 고구려 왕에게 서신을 보내 경고했으며,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을 동원해 수의 병기를 몰래 수리하는 등 의도를 의심했다. 양국은 이 시기 표면적으로는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지만, 고구려는 사신을 자주 파견하며 수의 동향을 정탐했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은 즉위 후에도 지속적으로 수에 사신을 보내며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전쟁 대비를 위한 정보 수집이었다.

598년: 고구려의 요서 선제공격과 수 문제의 반격

598년, 고구려는 말갈 병력과 함께 요서를 선제공격하며 수의 동북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이 공격은 영주(營州) 총관 위충에 의해 일단 저지되었지만, 수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수군과 육군 모두 홍수와 전염병 등 자연재해에 시달리며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는 전쟁이 길어질 것을 우려해 사신을 파견하며 사죄의 뜻을 전했고, 598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수에게는 고구려의 선제 공격이 큰 치욕으로 남았고, 이후 양제(煬帝)의 고구려 전쟁 집착의 계기가 되었다.

611 - 612년: 양제의 첫 번째 대규모 침공과 살수대첩

수 문제의 뒤를 이어 양제가 즉위하며 고구려에 대한 공격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양제는 611년 대규모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천명했으며, 612년에는 약 11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전쟁에 나섰다. 수군은 요동성을 포위하고 평양성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견고한 방어와 군량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수 군대는 살수(薩水)에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고, 이는 살수대첩으로 역사에 남았다. 수의 첫 번째 고구려 원정은 큰 손실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613년: 양제의 두 번째 침공과 실패

613년, 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이번에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요하(遼河)를 건넌 수군은 신성과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또한 양제의 측근인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키며 내부 혼란이 발생하자 양제는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 과정에서 고구려군은 수군을 추격해 수천 명을 사살하며 다시 한번 수나라를 좌절시켰다.

614년: 세 번째 전쟁과 무의미한 화친

614년, 양제는 세 번째로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군사를 징발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전쟁으로 고구려와 수 양국 모두 지친 상황이었다. 수 군대는 평양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리였다. 결국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며, 전쟁에 투항했던 인물인 곡사정을 돌려보냈다. 수나라는 더 이상의 전투를 지속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고구려와 수 전쟁

 

수의 멸망과 고구려 전쟁의 여파

양제의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는 수나라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대규모 토목공사와 궁궐 건설, 운하 개통 등으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결국 내부 반란을 초래했고, 수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수의 멸망 후 중원을 장악한 당나라 역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이어갔다. 이는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충돌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론: 고구려-수 전쟁의 역사적 의미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고구려의 군사적 역량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자, 수나라의 멸망을 촉발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고구려는 강력한 방어와 전략적 기습으로 대국 수의 침공을 막아내며 자주성을 지켰다. 반면, 양제의 무리한 전쟁 집착과 내부 정치는 수나라를 붕괴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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