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nglish Japanese

발해 건국: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새로운 나라

발해 건국
발해 건국

1. 영주(營州)에서의 이탈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나라(唐)는 고구려의 지배층과 유민들을 강제로 내지(內地)로 이주시키며 그들의 기반을 파괴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발해 건국의 주역들이 영주(營州, 현재의 중국 요령성 조양) 지역에서 반란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696년 5월, 거란족 추장 이진충(李盡忠)은 당나라의 지배에 저항하며 영주도독 조문홰(趙文翽)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주 지역은 혼란에 빠졌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 거란, 해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걸사비우(乞四比羽)가 각각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떠나 동쪽으로 이동했다.

 

2. 발해 건국의 과정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집단은 초기에는 당나라의 통제를 피해 동쪽으로 비교적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 방어 체계를 구축하자 당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의 작위를 제안하며 회유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나라의 지배를 거부하며 독립적인 움직임을 계속했다.

이후 당의 이해고(李楷固)가 이들을 공격했으나, 걸사비우가 전사하고 대조영이 남은 무리를 이끌며 천문령(天門嶺)에서 당군과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크게 패배하였고, 대조영은 그 여세를 몰아 동모산(東牟山, 현재의 길림성 돈화)으로 이동해 698년에 진국(震國)을 건국했다. 이후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渤海)'로 변경했다.

 

3. 발해의 주민 구성과 정체성

발해의 건국 세력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대조영은 '고려별종(高麗別種)', '속말말갈(粟末靺鞨)', '고려구장(高麗舊將)'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기록되며, 그의 출신 배경은 복잡하다.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말갈계 출신임에도 대조영은 고구려식 이름을 사용한 점에서, 이미 대조영 가문이 고구려 문화에 깊이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지배층과 주민 구성에서도 고구려와 말갈의 혼합이 두드러졌다. 육정산 고분군(六頂山 古墳群)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뿐 아니라 말갈계 고구려인과 순수 말갈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씨(高氏)와 같은 고구려 계통 성씨들이 발해 건국 후에도 주요 지배층을 구성했으며, 말갈인 지도자들이 지방 통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4. 발해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

발해의 이중적 주민 구성은 국가 정체성 해석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남한과 북한, 일본의 연구자들은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보았고,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규정하며 그 정체성을 강조했다. 중국은 발해의 피지배층이 말갈인이라는 점을 근거로 '발해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을 펴고 있으며, 이를 통해 발해 역사를 자국사에 포함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론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힘을 합쳐 만든 나라로, 대조영의 지도 아래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발해는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하며 고구려의 문화와 정체성을 계승하는 동시에 말갈의 특성을 받아들였다. 발해사의 해석을 둘러싼 현대적 논쟁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역사 해석의 중요성을 시사하며, 다양한 시각에서 균형 잡힌 연구가 필요하다.

 

함께 보면 좋은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