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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공주묘: 발해 초기 역사와 공주의 삶

정혜공주묘 표지석
정혜공주묘 표지석

1. 개요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는 발해 3대 왕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둘째 딸이 묻힌 무덤으로, 중국 지린성 둔화시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무덤은 발해 초기 역사와 공주 개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됩니다. 특히 묘 안에서 발견된 묘비는 그 주인이 정혜공주임을 명확히 밝혔으며, 문헌에 나타나지 않았던 발해의 초기 정보를 제공합니다. 현재 이 묘비는 중국 장춘시 지린성 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2. 정혜공주의 생애와 무덤 구조

2.1 무덤의 위치와 발견 과정

정혜공주묘는 둔화시 남쪽 육정산에 위치하며, 이곳은 여섯 개의 봉우리로 인해 ‘육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1949년 연변대학 주도로 9개의 고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었습니다. 무덤 안에서는 일곱 조각으로 깨진 정혜공주 묘비가 발견되었으며, 이를 통해 주인이 문왕의 딸임이 확인되었습니다.

2.2 무덤의 구조

정혜공주묘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형태로, 높이 1.5m, 깊이 2m의 무덤칸이 있습니다. 내부는 남북 2.8 - 2.94m, 동서 2.66 - 2.84m의 규모로, 고구려 후기 고분과 유사한 구조를 보입니다. 천장은 모줄임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바닥에는 벽돌과 평면석을 사용해 관대를 설치했습니다.

묘비는 화강암으로 제작된 규형비(圭形碑) 형태로, 높이 90cm, 너비 49cm, 두께 29cm입니다. 비문에는 공주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했으나, 일부는 파손된 상태였습니다. 이후 1980년에 발견된 동생 정효공주의 묘비와 비교함으로써 내용의 복원이 가능해졌습니다.

 

3. 정혜공주의 생애와 비문 내용

정혜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로,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한때 결혼했으나 남편과 어린 아들이 모두 일찍 사망한 비극을 겪었으며, 그녀 자신도 777년 여름 4월 14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시호는 정혜(貞惠)로, 사후 780년 11월 24일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되었습니다.

비문은 당대의 변려체 문체로 작성되었고, 공주의 생애와 성격을 서술합니다. 비문에서 정혜공주가 궁 밖에서 사망했다고 명시한 점은, 공주가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이주하지 않고 구국에 머물렀음을 시사합니다.

 

4. 발해 구국(舊國)과 정혜공주묘의 역사적 의의

정혜공주묘의 발견은 발해 초기 역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대조영이 당에서 탈출해 건국한 동모산(東牟山) 지역이 현재의 둔화시 인근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육정산 고분군 근처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과 오동성지(敖東城址)는 발해의 초기 수도 구국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4.1 오동성지를 구국으로 보는 이유

  • 발해 시기의 기와와 질그릇 조각이 출토됨
  • 동경용원부 및 중경현덕부와 유사한 성 구조
  • 교통 요지에 위치하며, 방어 위성이 주변에 존재
  • 상경용천부와 구국의 거리가 『신당서』에 기록된 300리와 일치

정혜공주가 사망한 777년은 이미 발해가 수도를 상경으로 천도한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무덤이 구국에 조영된 것은 발해에 귀장(歸葬) 풍습이 있었거나, 정혜공주가 상경으로 이주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5. 진릉과 정혜공주의 배장

정혜공주의 묘가 배장된 진릉은 육정산 고분군 제1고분군의 6호분으로 추정됩니다. 진릉의 주인으로는 2대 왕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가장 유력합니다. 이는 할아버지 무왕의 묘 곁에 공주가 배장된 사례로 해석됩니다. 당시 발해가 당(唐)의 장례 제도를 일부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6. 비문의 연호와 발해의 제도

정혜공주 비문에 등장하는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는 『신당서』에 기록된 대흥(大興) 연호 이후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발해는 대흥 연호 외에도 자체적인 연호 체계를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문에 기록된 3년상(三年喪) 풍습은 고구려와의 유사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됩니다.

 

7. 결론

정혜공주묘는 발해의 초기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주의 개인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특히 발해와 고구려, 당나라의 문화를 혼합한 흔적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구국과 상경 천도의 과정을 통해 발해의 정치적 변화와 수도 이전의 배경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혜공주묘와 묘비는 발해 왕실의 장례 관습과 수도 천도 이후에도 구국이 왕족의 묘지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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