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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역사와 예술을 엿보다: 정효공주묘와 중경현덕부

정효공주묘 벽화
정효공주묘 벽화

1. 정효공주묘 개요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발해의 3대 왕인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넷째 딸이 안장된 무덤으로, 오늘날 중국 지린성 허룽현 용두산 고분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발굴 당시 묘비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정효공주임이 밝혀졌으며, 이는 발해 초기 역사와 문화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정효공주묘와 인근 서고성(西古城)은 발해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비정(推定)되며, 발해 왕실의 생활과 그 시대 수도의 모습도 추측할 수 있게 해줍니다.

 

2. 정효공주의 생애와 무덤의 구성

2.1 정효공주와 그녀의 가족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 정확한 본명은 알 수 없으나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792년 여름, 36세에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11월 염곡(染谷) 서쪽 언덕에 배장되었습니다. 공주의 시호인 '정효'는 그녀의 덕행과 효심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것입니다.

2.2 묘의 구조와 벽화

정효공주묘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덤 내부는 무덤 칸과 안길로 나뉩니다. 묘실의 벽은 검은 벽돌로 쌓였고, 천장은 평행 고임 구조로 마감되었습니다. 무덤 내부 벽화는 발해인의 생활과 신분을 표현한 예술작품으로, 당시 발해의 복식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벽화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남쪽 벽: 무장한 호위무사
  • 동·서쪽 벽: 내시와 악사들
  • 북쪽 벽: 공주의 시종으로 보이는 인물들

2.3 발굴 과정과 출토 유물

1980년과 1981년에 걸쳐 발굴된 정효공주묘에서는 도굴의 흔적이 있었으나 몇 가지 유물과 벽화가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공주의 묘비는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으며, 이는 발해의 문학적 유산과 사상적 배경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비문은 당대에 유행한 변려체(騈儷體)로 작성되어 있으며, 공주의 생애와 가족사, 그리고 발해 왕실의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3. 발해의 불교적·유교적 문화

정효공주묘에서는 발해 왕실이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묘비에 등장하는 '금륜성법'(金輪聖法)이라는 표현은 발해 왕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을 추구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무덤 위에 탑을 세운 흔적이 발견된 것도 발해 왕실의 불교적 신앙을 보여줍니다.

한편, 묘비의 문장에는 유교 경전과 중국 문학작품에서 인용된 표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발해가 당시 유교적 가치관을 수용하며 문화적 수준을 높여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는 중국 당나라와 교류하면서도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4. 정효공주묘와 중경현덕부의 관계

정효공주묘의 위치는 발해의 수도였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와의 연관성을 시사합니다. 중경현덕부로 비정되는 서고성(西古城)은 용두산 고분군에서 동남쪽으로 약 13리 떨어져 있으며, 이는 당시 수도와 왕실 무덤의 지리적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서고성은 장방형의 성곽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됩니다. 성 내부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고, 건물지의 배치가 상경용천부와 유사하여 발해의 주요 수도였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성곽 근처를 흐르는 해란강과 산기슭의 고분군은 구국(舊國)의 오동성(烏桐城)과 유사한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서고성과 용두산 고분군의 관계는 발해 왕실과 귀족의 생활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발해사의 퍼즐 조각: 대흥 연호와 발해 왕실의 의문

정효공주와 관련된 비문에서는 대흥(大興)이라는 연호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발해 문왕이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로, 후에 잠시 보력(寶曆)으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대흥으로 회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연호의 변화는 발해의 정치적 상황과 문왕의 권위 강화를 반영하는 요소로 해석됩니다.

또한, 정효공주가 배장된 염곡에 대해 연구자들은 이곳이 그녀의 할아버지인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의 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의 장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확한 무덤의 주인은 밝혀지지 않아, 발해 왕실의 장례 문화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6. 결론

정효공주묘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입니다. 무덤의 벽화와 비문을 통해 발해인의 복식, 예술,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엿볼 수 있으며, 왕실과 불교의 관계, 유교적 가치관의 수용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효공주묘와 서고성의 지리적 연관성은 발해의 수도 중경현덕부를 재조명하게 해주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발해는 중국의 영향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동아시아의 중요한 고대 국가입니다. 정효공주묘와 같은 유적들은 발해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는 귀중한 자원으로, 앞으로도 다양한 학문적 연구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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