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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衛滿] – 망명객에서 왕위 찬탈자로

1. 개요

위만(魏滿, 衛滿)은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명을 유지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있었던 시기를 우리는 '위만 조선'이라 부른다. 이 시기는 고조선의 한 시대를 상징하며, 그의 왕위 찬탈과 그 이후의 정책들이 고조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유사 위만조선 기사
삼국유사 위만조선 기사

 

2. 위만의 이름

위만이라는 인물에 대해선 그 이름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사서 『사기(史記)』로, 그곳에서는 그를 '조선왕 만(滿)'이라 칭하고 있다. 후한 시대에 쓰여진 『잠부론(潛夫論)』에서는 처음으로 '위만(魏滿)'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며, 이후 『삼국지』와 『후한서』 같은 사서들에서도 '위만(衛滿)'으로 기록된다. 우리나라의 사서인 『삼국유사』에서도 '위만(魏滿)'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가 그의 성이고 '만'이 이름일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위'가 '魏'인지 '衛'인지도 불확실하다.

위만(衛滿) 한 혜제(漢惠帝) 원년 정미년에 위만이 기준을 축출하고 왕검성(王儉城)에 웅거하면서 국호를 또한 조선이라 하였다. 왕검성 【지금의 평양】 에 도읍하고 사방 고을 수천 리를 침략하여 항복받았다. 한 무제 때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는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많은 사람들을 유인하여 끌어들였고, 일찍이 한나라 황제를 알현한 일이 없다.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조빙하려 하니 우거가 길을 막고 통과하지 못하게 막았다. 황제가 우거를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으나 우거는 끝내 한나라를 받들어 조빙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한나라 사신을 죽여 버렸다. 원봉(元封) 3년 계유년에 황제가 제남 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 정벌토록 하자, 나라 사람들이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그 땅을 나누어 4군(四郡)을 두었다. 정미년에 흥기하여 계유년에 멸망하기까지 모두 87년이다.

3. 위만의 출신에 대한 논란

위만의 출신에 대한 논란은 오랜 기간 계속되고 있다. 『사기』에서는 그를 옛 연(燕) 나라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는 고조선으로 망명할 당시 북상투(魋結)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위만은 순수한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 계통의 인물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위만을 한족으로 보고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에 대한 반발로, 위만을 고조선 계통의 인물로 보려는 시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고조선에서의 새로운 정착지로 옮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식을 바꾼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또한 그가 한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당시 조타(趙佗)와 같은 다른 외부 인물들이 이민족의 복식을 선택한 사례가 있는 만큼, 단순히 외형적 요소로 출신을 단정짓기는 어렵다.

 

4. 망명자에서 왕으로

위만은 처음 고조선으로 망명하면서 준왕에게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지키겠다고 자처하였다. 준왕은 위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를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땅을 내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이곳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며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졌다.

이후 위만은 한나라로부터 군사적 위협이 다가온다는 핑계로 왕궁을 보호하겠다고 속이고, 기습적으로 준왕을 공격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준왕은 도망쳐 남쪽으로 피신했고, 위만은 고조선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5. 위만의 외교 정책과 고조선의 번성

위만이 왕이 된 후, 그는 무력을 기반으로 고조선을 안정시키고 주변 세력을 복속시켜 나갔다. 위만은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한나라의 외신으로서 동이(東夷) 지역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또한 고조선은 한나라와 동이 종족들 간의 교역 중개 역할을 맡아 막대한 재화를 축적하였다.

위만의 고조선은 주변 지역인 진번(眞番)과 임둔(臨屯)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의 외교와 군사적 정책 덕분에 고조선은 한나라로부터의 망명자들과 교류를 확대하며 번성하였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그 범위가 사방 수천 리에 이르는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6. 위만의 정치 구조와 유이민(流移民) 세력

위만의 왕위 찬탈은 중국에서 유입된 유이민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고조선의 기존 토착 세력들을 효과적으로 포섭하며 통치 기반을 넓혔다. 왕으로서 그는 기존의 고조선 자치체인 '상(相)'이라 불리는 수장들의 자치권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었다.

위만이 만들어낸 고조선은 유이민 세력과 토착 세력 간의 협력으로 운영되는 독특한 정치체였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고조선의 번영을 불러왔으며, 그의 정치적 지혜와 외교적 수완은 고조선을 당시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국가로 부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7. 위만의 영향과 고조선의 변화

위만의 등장은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켰다. 그의 왕위 찬탈은 고조선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했으며, 그의 정책들은 고조선의 번영을 이끌었다. 비록 출신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위만이 고조선을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점은 명백하다.

위만 조선은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며 지속되었지만, 결국 한나라와의 충돌로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고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국사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8. 결론

위만은 망명자에서 왕위 찬탈자로, 그리고 고조선의 번영을 이끈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출신에 대한 논란이 있더라도 그는 고조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통치는 고조선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으며, 외교적 수완과 정치적 안목으로 고조선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위만의 등장은 고조선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그가 이룬 정치적 성과는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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