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nglish Japanese

동명성왕(東明聖王): 고구려의 창시자

평남 중화 동명왕릉
평남 중화 동명왕릉

동명성왕(기원전 58년 - 기원전 19년)고구려의 창건자로서 고대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부여에서 태어나 고구려를 건국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본래 주몽(朱蒙)으로, 고구려의 왕실은 그의 이름을 따 후세에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주몽의 출생과 성장

동명성왕, 즉 주몽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매우 신비롭게 전해집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화는 해모수와의 관계로 인해 동부여에서 추방되었고, 금와왕(金蛙王)의 보호 아래에서 주몽을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주몽의 출생 설화에서는 그가 알에서 태어난 비범한 인물로 묘사되며, 이는 고구려의 시조로서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보입니다.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의 이름인 '동명'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東明王)과 동일합니다. 이는 고구려 건국 설화가 부여의 건국 설화를 차용하여 고구려와 부여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주몽의 출생 설화는 그가 천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고구려의 건국에 신화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건국의 여정

주몽은 부여에서 성장하며 금와왕의 아들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활을 잘 쏘아 주변에서 주목받았으며, 이로 인해 이름이 '주몽'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몽의 재능이 두드러지자 금와왕의 아들 대소(帶素)는 그를 질투하였고, 주몽을 해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몽은 뛰어난 용력과 지혜로 위기를 극복하였고, 결국 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중국 지린성 지안)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중국 지린성 지안)

주몽이 부여를 떠나기 전에 기지를 발휘해 준마를 손에 넣고,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의 친구들과 함께 도주를 감행하였습니다. 도주 중 엄사수(淹㴲水)에서 주몽은 자신의 신성한 혈통을 밝히며 하늘에 도움을 청했고,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그를 돕는 신화적 사건이 전해집니다. 이러한 설화는 고구려 건국의 정당성과 주몽의 비범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구려의 건국과 송양왕의 복속

기원전 37년, 주몽졸본천(卒本川) 근처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이때 주몽의 나이22세였으며, 고구려는 그의 리더십 아래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주몽은 주변의 세력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송양왕(松讓王)이 다스리던 비류국(沸流國)은 고구려에 강력한 적대 세력이었지만, 주몽은 활쏘기 대결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송양왕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854년《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에 나온 금와왕 삽화
1854년《조선정벌기(絵本 朝鮮征伐記)》에 나온 금와왕 삽화

주몽이 고구려의 왕이 된 이후에는 동북아시아의 다른 세력들과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나라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특히 부여와의 관계는 미묘하였습니다. 부여의 금와왕은 주몽의 어머니 유화의 죽음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고, 주몽은 이에 보답하여 부여에 사신을 보내는 등, 양국 간의 외교는 비교적 원만하게 유지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성장과 영토 확장

주몽은 고구려 건국 후에도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기원전 32년, 그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복속시켰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였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고구려의 영토를 넓히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고구려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주몽의 탁월한 지도력은 고구려의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정치적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동명성왕의 죽음과 신격화

기원전 19년, 주몽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매우 신비롭게 전해집니다.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주몽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동명왕편』에서도 주몽이 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들이 왕의 옥 채찍을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몽이 단순한 인간 군주가 아닌, 천제의 손자로서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기록입니다.

주몽은 고구려의 창건자이자 고구려 왕실의 신성한 기원을 나타내는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후대에 많은 신화적 윤색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정치적 업적 또한 무시할 수 없으며, 그는 고구려를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동명성왕의 역사적 의미

동명성왕은 단순히 고구려의 건국자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 왕실에 신성한 혈통과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출생과 행적에 대한 신화적 기록은 고구려인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으며,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신화적 요소들은 고구려의 정치적 권위와 통치 이념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동명성왕 주몽은 그의 업적과 신화적 서사를 통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고구려 왕실뿐만 아니라 후대 역사서와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며,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일환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함께 보면 좋은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