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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 부여와 마한의 후예가 세운 나라

1. 백제의 건국과 개요

백제는 고대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삼국 중 하나로, 부여계 이주민 집단마한(馬韓)의 소국 백제국(伯濟國)이 결합해 세운 국가입니다. 전통적으로 기원전 18년을 건국 연도로 보지만,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가 엇갈리며 그 실체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입니다. 백제의 중심지는 서울(위례성)이었으며,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주변국과의 다양한 교류와 충돌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온조 1년조)
삼국사기(온조 1년조)

2. 백제의 건국 설화와 부여와의 관계

2.1 온조와 비류의 이야기

삼국사기(三國史記)』는 백제의 건국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아들 유리를 후계자로 삼자, 유리의 이복동생 온조(溫祚)비류(沸流)는 각각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남하했습니다.

  • 비류: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정착해 나라를 세움.
  • 온조: 위례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정함.

초기 국호는 십제(十濟)였으나, 비류가 죽은 뒤 그의 신하들을 받아들이면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신화적 요소가 거의 없고, 현실적인 서술이 두드러져 주몽 계보와 백제 왕실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2.2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 신화와의 연관성

백제 건국 설화는 고구려와 부여의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를 북부여의 후손 우태(優台)로 언급합니다. 반면, 중국 정사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백제의 시조로 부여왕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등장합니다.

  • 부여 건국 신화: 동명이 하늘신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남하하여 부여를 세움.
  • 고구려 주몽 신화: 동명과 유사한 이야기로, 주몽이 부여에서 고구려를 건국함.

백제의 설화 역시 부여와 고구려의 연장선에서 해석됩니다. 이는 백제 왕실이 하늘신의 후손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3. 백제 건국 시점에 대한 논쟁: 문헌과 고고학

3.1 『삼국사기』와 중국 문헌의 모순

『삼국사기』는 백제의 건국 시점을 기원전 18년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는 백제의 존재 대신 마한 연맹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백제의 초기 역사가 마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삼국지』에는 백제국(伯濟國)이라는 소국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는 백제(百濟)가 기원전부터 존재했다기보다는 마한의 한 소국에서 성장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기록의 모순은 학계에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3.2 고고학적 발견: 초기 백제의 실체

서울 송파구의 올림픽공원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에서 백제 초기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3세기 이전의 유물과 유적은 드물며, 대부분 3~4세기에 집중됨.
  • 당시 발견된 왕릉들은 고구려의 적석총(積石塚)과 유사한 형태를 띔.
  • 백제의 도읍지였던 위례성(서울) 부근에서 초기 백제의 흔적이 확인됨.

이와 같은 발굴 결과로, 백제가 마한의 소국에서 출발해 부여계 이주민과 결합하여 3세기 무렵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주서(周書)』에 등장하는 부여씨(夫餘氏)라는 기록은 백제가 부여계통의 집단과 관련이 깊음을 나타냅니다.

 

4. 백제의 성장과 주변 세력 통합

4.1 마한과의 관계와 세력 확장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건국 초기에 마한의 중심 세력인 목지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백제는 말갈(靺鞨)과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며 점차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 서기전 6년(온조왕 13년): 백제의 영토가 패하(임진강)에서 남쪽의 웅천(금강)까지 확장됨.
  • 서기 9년(온조왕 27년): 마한을 병합하여 한반도 중서부를 통합.

백제의 초기 확장은 고구려와의 유사한 무덤 양식과 중국에서 수입한 위세품(威勢品)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들은 중국의 청자, 금제 허리띠, 옥 장식 등으로, 당시 백제 왕실이 외교적 교류를 통해 주변을 지배하는 데 사용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4.2 백제의 성장과 남부여 국호 변경

백제는 538년 성왕 대에 이르러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며 부여와의 연관성을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부여계 국가로서 정통성을 강화하고, 고구려와 신라에 맞서는 삼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 결론: 백제 건국의 의미와 역사적 해석

백제의 건국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부여와 고구려, 마한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고대사의 한 축입니다.

  • 건국 시기: 기원전 18년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3~4세기 무렵 본격적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부여계와 마한계의 융합: 북방의 부여계 집단과 한강 유역의 토착 집단이 결합하며 발전.
  • 중국과의 교류: 위세품을 통해 주변 소국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장.

이렇듯 백제는 남북 문화의 융합중국과의 외교를 바탕으로 성장한 고대 국가로, 그 과정에서 부여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백제는 삼국 중 하나로 자리하며, 이후 남부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 『삼국지』
  • 『북사』, 『수서』, 『주서』
  •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발굴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