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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문왕(文王)의 통치와 업적

발해 문왕(文王)
발해 문왕(文王)

1.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

발해 3대 왕인 문왕(文王, 재위 737~793)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의 아들로, 무왕이 병사한 737년에 즉위하였다. 그의 본명은 대흠무(大欽茂)로, 약 57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발해의 기틀을 다지고, 국가를 안정기로 이끌어낸 중요한 인물이다.

 

2. 당과의 관계 개선 및 체제 정비

문왕은 즉위 초부터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집중하였다. 그의 전임자인 무왕이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며 대립했던 것과 달리, 문왕은 당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유교 사상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며, 내실 있는 국가를 건설해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문왕은 즉위 다음 해인 738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당례(唐禮)』,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등 다양한 책의 필사를 요청하며 학문과 제도를 정비했다. 그가 요청한 『당례』는 732년에 완성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로, 이를 통해 최신의 예법을 습득하고 내치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3. 발해의 중앙 및 지방 행정 체제 구축

문왕은 당나라의 행정 체제를 본떠 발해에 3성(省) 6부(部) 체제를 확립했다.

  • 3성:
    • 선조성(宣詔省) – 왕명의 출납을 담당
    • 정당성(政堂省) – 행정 전반을 주관
    • 중대성(中臺省) – 감찰 기능 담당
  • 6부:
    •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知部), 예부(禮部), 신부(信部)로 당나라의 이부, 호부 등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발해는 또한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전국을 나누어 효율적인 지방 통치 구조를 마련했다. 대표적인 5경으로는 상경(上京), 중경(中京), 동경(東京), 남경(南京), 서경(西京)이 있었고, 각 경에는 행정과 군사적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지방 행정의 정비는 선왕 시기(818~830) 발해의 최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4. 독자적 연호와 왕권 강화

문왕의 통치에는 강한 왕권 의식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발해가 스스로 황제국임을 자처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문왕은 발해 신하들로부터 황상(皇上)이라 불리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자신을 천손(天孫, 하늘의 자손)이라 칭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발해가 당나라와 동등한 위치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문왕이 불교에 심취했다는 점도 그의 통치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륜성왕(불교에서 이상적인 왕)의 이미지를 추구하며, 금륜(金輪)과 성법(聖法)이라는 불교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발해가 불교문화를 국가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5. 딸들의 묘지명과 문왕의 슬픔

문왕의 두 딸인 정혜공주(貞惠公主)와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지명은 발해사의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정혜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로 777년에 사망했고, 정효공주는 넷째 딸로 792년에 생을 마감했다. 이들의 묘지명에는 문왕의 업적과 당시 사용된 연호들이 기록되어 있어 발해의 역사 복원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정효공주 묘지
정효공주 묘지

특히,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문왕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딸의 죽음을 애도한 문왕은 조회를 중단하고 음악을 금지하는 등 큰 슬픔에 잠겼다. 또한 문왕이 이때 황상(皇上)으로 불렸다는 기록은 그가 단순한 왕이 아닌 황제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6. 문왕의 사후와 발해의 혼란

57년간 왕위에 있었던 문왕이 793년에 사망한 후, 발해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그의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죽는 바람에 문왕의 족제인 대원의(大元義)가 왕위에 올랐으나,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가 즉위해 성왕(成王)이 되지만, 그 역시 짧은 재위 후 사망하면서 왕권이 불안정해졌다.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 등 왕위가 잦은 교체를 겪는 동안 발해는 혼란을 거듭했고, 818년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가 즉위하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7. 결론: 발해 문왕의 유산

문왕의 통치는 발해의 내적 안정과 발전을 이끌어낸 중요한 시기였다. 그의 노력은 후대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정도로 번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당과의 외교적 관계 개선, 3성 6부의 행정체제 도입, 지방 제도의 정비, 불교의 발전 등은 모두 문왕의 통찰력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예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이어진 왕위 교체와 혼란은 문왕이 발해의 통치 구조와 후계 문제를 더 철저히 준비할 필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왕은 발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그의 업적은 발해의 황금기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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