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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한화정책과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 개혁

경덕왕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석굴암 본존불
경덕왕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다고 전해지는 석굴암 본존불

경덕왕 개요

경덕왕(景德王, ?~765)은 신라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년부터 765년까지다. 그는 통일신라 중대의 마지막 왕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과 관료제 확충을 추진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직계로서 경덕왕은 중대의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으며, 진골 귀족과의 권력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 왕이었다.

 

생애와 가계

경덕왕의 본명은 김헌영(金憲英)이다. 그는 제33대 성덕왕(聖德王)소덕왕후 김씨의 아들로,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의 동생이다. 경덕왕은 어린 시절부터 관직을 거쳐 태자로 책봉되었고, 효성왕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은 두 명의 왕후와 혼인하였다. 첫 번째 왕후였던 삼모부인(三毛夫人)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되었고, 이후 만월부인(滿月夫人)과 결혼하여 훗날 제36대 왕인 혜공왕(惠恭王)을 낳았다.

그는 765년에 사망하여 경주 경덕왕릉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중국 사서에는 그가 737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어 역사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왕권 강화를 위한 관제 정비

경덕왕은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한 다양한 관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즉위 후 집사부(執事部)의 장관 직책을 중시(中侍)에서 시중(侍中)으로 개칭하며 권위를 높였다. 또한, 시중을 수시로 교체하여 왕권 주도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의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국학(國學) 강화였다. 747년 국학에 박사(博士)조교(助敎)를 두어 관료 교육을 체계화하였고, 758년에는 율령박사(律令博士)를 임명해 법제 교육을 강화했다. 이러한 제도적 정비는 유교적 이념에 기반한 통치 구조를 완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화정책과 지명 개정

경덕왕의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이다. 이는 신라의 관직명과 행정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작업으로,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 신라의 통치 구조를 중국식 관료제로 재편하려는 의도였다.

757년에 그는 신라 전역의 지방 지명을 중국식으로 개정하였고, 759년에는 중앙과 지방의 관부와 관직명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신라 전통보다는 중앙 집권화된 왕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났다.

 

진골귀족과의 타협: 녹읍 부활

하지만 경덕왕의 개혁 정책은 진골 귀족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756년에 상대등 김사인(金思仁)이 경덕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며, 왕권 강화책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경덕왕은 녹읍(祿邑)을 부활시키며 진골 귀족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녹읍은 신문왕(神文王) 시기 폐지된 제도로, 귀족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경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녹읍을 부활시켰다.

 

경덕왕의 정책과 한계

경덕왕의 한화정책은 비록 일시적으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764년에는 귀족 세력인 김양상(金良相)만종(萬宗)이 각각 시중과 상대등으로 임명되면서 왕권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되었다. 김양상은 후에 선덕왕(宣德王)이 되어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다.

 

결론: 경덕왕의 정치적 유산

경덕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꿈꾸었지만, 결국 귀족 세력과의 타협으로 인해 그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의 사후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는 다시 진골 귀족의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

그가 추진했던 한화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 혜공왕 시기인 776년에 원래의 지명과 관직명으로 복원되었다. 경덕왕의 개혁은 그의 왕권 강화 의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귀족 세력과의 권력 다툼 속에서 한계에 부딪힌 신라 정치의 현실을 드러내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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