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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阿莘王): 광개토왕 정복 전쟁의 최대 피해자

삼국사기 아신왕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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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 개요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은 백제의 제17대 왕으로, 그의 통치 시기는 광개토왕의 남진(南征)과 맞물리며 백제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패배와 굴욕을 겪은 시기였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도 한성(漢城)이 포위되고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며 항복하는 등 극심한 수난을 당했다. 또한,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을 왜(倭)에 보내 군사적 협력을 구했으나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최후를 맞았다.

 

아신왕의 가계와 즉위 과정

아신왕은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진씨(眞氏)였으며, 아신왕에게는 후에 왕위를 계승한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420)을 포함한 자식들과 두 동생 훈해(訓解)설례(碟禮)가 있었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백제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표출된 흔적이 보인다. 침류왕의 사망 이후 그의 동생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392)이 왕위에 오르며 부자(父子) 상속 대신 형제 상속이 이루어졌고, 이는 불안정한 정권 교체를 초래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사왕의 즉위는 일종의 찬탈로 해석되며, 결국 그의 사망 이후 아신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신왕의 즉위 배경에는 진사왕에 반발하는 세력과 아신왕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정치적 정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아신왕은 즉위 초기부터 불안정한 왕권을 유지하며 외부의 고구려 위협과 내부의 정권 갈등을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고구려와의 갈등과 패배의 연속

고구려와의 관계 변화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시절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며 강력한 북방 세력을 구축했지만,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체제 정비 이후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2)의 등장으로 백제와 고구려 간의 세력 균형은 완전히 깨졌다.

 

 

진사왕 말기에는 이미 고구려가 북쪽의 석현성(石峴城)관미성(關彌城)을 점령하며 백제의 주요 영토가 상실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백제 수도 한성은 고구려의 공격 범위에 들어가며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아신왕의 저항과 실패

아신왕은 고구려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외삼촌 진무(眞武)를 병력을 담당하는 좌장(左將)으로 임명하고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석현성관미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패배했고, 수곡성(水谷城)패수(浿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으나, 폭설과 유성이라는 돌발적인 기후 변화로 인해 청목령(靑木嶺, 현재 개성 인근)에서 퇴각해야 했다.

고구려에 맞선 계속된 군사 동원은 백성들을 지치게 했고, 일부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광개토왕의 한성 공격과 아신왕의 굴욕

396년(아신왕 5), 광개토왕은 직접 백제를 공격해 수군을 동원하여 한강을 건너 한성을 포위했다. 궁지에 몰린 아신왕은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며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이 과정에서 광개토왕은 58성700촌을 점령하고 백제 왕족과 대신 10여 명을 포로로 삼아 돌아갔다.

광개토왕이 백제를 집중 공격한 이유는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백잔(百殘)"이라는 멸시적인 표현에서 당시 고구려가 백제를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와의 외교 시도와 군사 협력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신라와의 동맹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신라는 이미 고구려와 밀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백제와는 단절된 상태였다. 이에 아신왕은 왜(倭)와의 협력을 모색했다.

397년(아신왕 6),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왜에 질자(質子)로 보내며 우호를 도모했다. 태자 전지의 왜 체류는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절박한 외교적 조치였다. 왜 역시 백제와의 동맹에 응하여 신라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399년, 왜가 신라 국경을 공격하며 국지적인 충돌이 발생했고, 신라는 광개토왕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해 신라를 구원하며 왜와 백제의 공격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아신왕의 죽음과 왕위 계승 전쟁

405년(아신왕 14), 왕궁 근처에 흰 기운(白氣)이 나타나며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조짐이 기록되었다. 아신왕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비정상적인 죽음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신왕이 죽자 그의 동생 훈해가 임시로 정권을 맡아 태자 전지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막내 동생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전지는 왜군의 호위를 받아 귀국한 후, 한성 사람 해충(解忠)의 조언을 받아 상황을 지켜보다 설례가 죽은 후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로써 아신왕의 지지 세력이었던 진씨 세력은 몰락하고, 새로운 전지왕의 집권과 함께 왕실 내부의 권력 재편이 이루어졌다.

 

결론: 끝없는 패전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진 왕

아신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대결하며 백제의 영토와 권위를 지키려 했지만, 번번이 패배하며 국력을 소진시켰다. 외교적으로는 왜와 협력해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왕권의 약화와 내외부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죽음은 또다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신왕의 통치는 백제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 중 하나로, 그의 실패는 이후 백제의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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