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무왕(재위: 719~737) 대무예(大武藝)는 발해의 제2대 왕으로, 고왕 대조영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기간은 발해의 대외 정책에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무왕은 당과 대립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썼고, 이를 바탕으로 아들 문왕(文王)이 체제를 안정적으로 정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2. 주변 민족의 복속과 영토 확장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무왕은 "영토를 크게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섬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무왕이 초기에 말갈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음을 의미한다.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풍을 이었다고 자평하며, 열국을 주관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음을 과시했다.
3. 흑수말갈(黑水靺鞨)과의 갈등과 대응
726년 당이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면서, 발해의 영향력이 있던 지역이 당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이는 발해의 세력 확장에 대한 견제였다. 흑수말갈이 당과 독자적으로 접촉하자, 발해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무왕은 흑수말갈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동생 대문예(大門藝)는 이에 반대했다. 대문예는 당의 군사력과 발해의 현 상황을 고려했을 때,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무왕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문예를 선봉장으로 내세워 흑수말갈을 토벌하게 했다.
4. 대문예의 당 귀순과 그 여파
대문예는 결국 왕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출병했지만, 국경에 이르러 다시 무왕에게 상소하며 토벌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무왕은 대문예가 싸울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대신 대일하(大壹夏)를 보내 대문예를 소환해 처벌하려 했다. 이에 대문예는 군사를 버리고 당으로 귀순했다.
당에서는 대문예를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 임명하며 그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무왕은 이에 크게 분노하며 당에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당은 이를 거부하며 대문예를 보호했다. 무왕은 대문예의 존재가 발해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자객을 보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는 대문예의 귀순 사건이 단순한 혈육 간의 배신을 넘어 발해의 국가적 안보와 직결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5. 당과의 갈등과 등주 공격
발해와 당의 관계는 대문예의 귀순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유지되었다. 발해는 왕자와 왕제를 당에 숙위로 보내며 외교적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무왕은 대문예 문제로 인한 불만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당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었다.
728년 무왕의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당에서 사망하면서 발해와 당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당은 대문예를 감싸며 발해의 불만을 무시했고, 이에 무왕은 결국 732년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를 파견해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처단했다.
당은 이 공격에 대응해 우령군장군 갈복순(葛福順)과 대문예의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했다. 당은 또한 신라의 태복경 김사란(金思蘭)을 신라로 돌려보내 남쪽에서 발해를 압박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라의 공격은 혹독한 날씨와 폭설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6. 무왕의 대당 강경책과 그 의의
무왕은 발해 군사력이 고구려의 삼분의 일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주를 기습 공격하여 발해의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는 발해가 당에 맞서 자주적인 외교와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또한 말갈 제부의 이탈을 막기 위한 강경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무왕의 이러한 정책은 이후 문왕의 통치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무왕의 강력한 외교와 군사적 노력 덕분에 문왕은 내부 통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발해는 문치를 시행하며 안정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7. 결론
무왕 대무예의 통치는 발해의 대외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흑수말갈과의 갈등, 대문예의 귀순, 등주 공격 등 일련의 사건들은 발해의 외교와 군사적 역량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왕은 당과 대립하면서도 강경한 외교 정책을 통해 발해의 독립성과 영토 확장을 지키려 했다. 이러한 무왕의 노력은 발해의 후대 왕들이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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